철학 [Philosophie]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철학은 왜? 그리고 어떻게? 에 대한 대답을 찾게 한다
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 돈, 명예, 권력? 당신에겐 어떤 가치가 가장 중요하고 왜 그걸 위해 사는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잔인하고 참혹한 현실과 대면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돈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속는 사람이 병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환경에서 그런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단언컨대 그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다. 뭐 눈엔 뭐만 보이듯, 남을 속이고 피해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자신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을 온전히 믿을 수 없고 결국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평생 의심과 걱정 속에 살게 된다. 이렇게 단죄의 결말이라도 피해자의 비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공평하지 않다. 권선징악은 픽션에 가깝고 사필귀정은 결국 정의나 바른길로 돌아가지 못한다.
세상은 정의롭지 않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듯 그런 개념들에서 일어난 감정과 생각들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으로 작용해 현실을 왜곡시킨다.
부처의 집착에서 고통이 시작된다는 깨달음은 선악과 정의, 부, 명예 권력같은 모든 것들은 사실 실체가 없으며 그런 실체가 없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부질없는 행위라 말한다. 자연의 이치는 선악이나 정의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가장 일어날 확률이 높고 복잡한 과정이 아닌 가장 쉽고 단순한 과정이 선택받는다. 자연의 이치는 복잡하지 않다.
선과 악의 본질, 정의 (正義, Justice) 란 무엇인가?
극단적인 전쟁 상황에서 내 편이면 선, 정의라는 명분, 나는 좋은 사람이다 생각한다면 대립하는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선악과 정의는 사라진다. 사실 그런 명분은 처음부터 모순이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데로 남을 대접하라,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아라"
수많은 종교와 철학의 진리 <황금률>은 남과 나를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며 율법이다.
남을 나와 동일시했을 때 내가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남에게 행동하는 건 악이다.
죄수의딜레마 반복게임은 결국 무조건 협력을 선택해야만 가장 최선의 결과 나온다. 상대가 배신을 선택했을 때는 보복을 그리고 다시 협력을 선택하면 다시 협력을 하는선택이 가장 최선이다.
배신한 상대방이 다시 협력했을 선택했을 때 바로 다시 협력을 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쉽지 않겠지만 그게 가장 최선이다.
우리는 대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정답은 하나가 아닌 경우도 있고, 단면적인 논리는 입체적인 실체를 포착하지 못해 역설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옳다고 상대방이 틀린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았을 뿐이다”
흔히 “내가 옳다”는 확신 속에서 상대방의 관점을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진실은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을 때가 많다.
세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창
“행복한 사람의 세계는 불행한 사람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6.43)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신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물리적인 외부 세계가 아닌, 정신세계에서 만들고 판단하게 된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신념과 관점으로 서로 다른 현실을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객관적 사실이나 본질이 아니라, 신념이란 창에 투영된 상(像)이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은 세상을 가능성과 희망으로 채워진 곳으로 보지만, 불행한 사람은 한계와 고통으로 가득 찬 곳으로 본다. 세상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 상태와 믿음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인류 82억 명이 공존하는 객관적, 보편적 실제(實際, Real)라는 공통의 기반 위에서 수많은 주관적 세계가 겹쳐져 있다.
누군가는 철학을, 누군가는 신을, 또 누군가는 과학을 믿으며, 각자의 신념으로 구축한 세계관 속에서 실재(實在, existence) 하는 세상을 경험한다
실제(實際) ‘사실’에 초점
실재(實在) ‘존재’에 초점
신이라 불린 철학가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며 사실들의 총체"라고 말했다.
현실에는 신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또 다른 무언가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믿음들은 모든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다른 관점의 충돌을 야기한다.
하지만 물리 법칙을 공유하는 객관적 현실은 이러한 믿음들이 충돌하지 않는 ‘믿음 중립 지대’로 작용한다.
각자의 주관적 신념이 믿음 중립 지대에 법칙에 위배 된다면 물리적 실체로 나타날 수 없고, 만약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건 우연처럼 보일 것이다. 주관적 믿음들은 각자의 정신세계 속에서만 실재한다.
이러한 주관적 세계들이 위대한 깨달음을 중심으로 합의될 때, 비로소 객관적 현실의 실체를 형성한다.
샘 리처드 (Sam Richards) 팬실베니아주립대 사회학교수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을 진짜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짜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세계에서 실재한다. 행복한 사람의 세계는 희망과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반면, 불행한 사람의 세계는 고통과 제약으로 가득하다.
이 두 세계는 객관적으로는 동일할지라도, 각자의 내면과 신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로 경험된다. 우리는 서로 다른 믿음과 관점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러한 주관적 세계가 합의와 소통을 통해 객관적 현실의 실체를 만들어간다.
세상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존재한다. 세계는 우리 마음의 거울이며, 진정한 현실은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느끼고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내가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내가 말하는 것,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것,
당신이 듣고 있다고 믿는 것,
당신이 듣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
당신이 이해하는 것,
이렇게 열 가지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설령 그럴지라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면 안 된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인간의 세계는 언어와 경험에 사로잡혀 한계 지어져 있다.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기란 너무나도 어렵다. 한 생각을 오랫동안 잡고 있는 것도 어렵다. 생각은 휘발성이 강해서 금방 사라진다.
수많은 지식인과 성인들은 평생을 바쳐 얻어 낸 깨달음과 생각들을 정리해 개념으로 묶었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단어들을 발판, 사다리처럼 이용해 더 깊은 생각으로, 다른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그전에는 무의식이라는 게 없었다. 데카르트에 심신이원론으로 르네상스가 열리기 전에는 과학을 이단 취급하며 과학자들을 화형 시켰다. 작은 개념이 명분이 된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은 세상을 바꿨고 우리는 이런 개념을 통해 너무 나도 쉽게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바꿀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것들은 이름이 없을 때는 말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나 방사능 전자기파등 수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아직도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신비들이나, 아직 이름 없는 개념들이 존재하며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언어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다. 말하자면 신비로운 것,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는 말하는 순간 오해를 불러온다. 또한,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과 믿음은 현실을 왜곡시키며, 그렇기에 인간의 기억은 더더욱 신용이 떨어진다. 때문에 신이라 불린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 논리철학 논고 -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1.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1.11 세계는 사실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것들이 모든 사실들이라는 점에 의하여 확정된다.
1.12 왜냐하면 사실들의 총체는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그리고 또한 대체 무엇이 일어나지 않는가를 확정하기 때문이다.
...
..
.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카뮈
오랜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비트겐슈타인은 1951년 62세의 나이로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전 "사람들에게 내가 아주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계를 확정하는 건 일어나는 모든 사실들이다.
개인의 정체성
테세우스의 역설은 테세우스의 배의 낡은 판자를 떼어다가 새로운 판자로 교체하는데 그 낡은 판자를 모아 옆에 똑같은 배를 만든다면 테세우스의 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나무판자를 모아 만든 대상에 테세우스의 배라는 가상의 의미를 부여한 거지 애초에 테세우스의 배란 건 없다.
가상으로 만든 의미는 대상을 편하게 말하기 위한 약속일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사람도 매일 엄청난 수의 세포가 죽고 다시 만들어지고를 반복한다. 몸의 모든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는데 7년 정도가 걸린다. 그렇다면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나일까?
뭐가 진짜일까?
통 속의 뇌라는 사고실험이 있다. 통 속의 뇌에 컴퓨터로 자극을 주어 현실처럼 인식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실제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 통 속에 들어있는 우리의 뇌가 가상의 자극을 현실인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면,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이 생각들은 데카르트의 악마에서 나왔다. 어떤 강력한 능력을 가진 악마가 자신에게 개입해서 모든 감각에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 경우를 상정한 사고실험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했고 "나라는 존재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일단은 사유를 하고 있다, 그렇기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없이 진실이다" 결국 그가 얻어낸 답은 의심하고 있는 이 생각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이 탄생했다.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개념을 제시하여 과학과 종교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과학자들은 종교 재판의 두려움 없이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문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런 위대한 깨달음이 담긴 철학은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고 정립하는 여정이다.
단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철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하여 고정관념을 허물게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각자의 신념을 재평가하고,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우리는 위대한 깨달음을 언어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많은 이들이 손가락 끝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그 너머의 달을 보지 못한다. 진정한 앎에 이르려면 스스로 사유하고 경험하며 깨달아야 한다. 언어로 이해하는 것과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씨앗 같은 철학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된다.
- 관념론: '오직 정신 혹은 영혼 만이 존재한다.'
- 유물론: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
- 심신 이원론:'물질과 정신이 둘 다 존재한다'
- 실재론:'나 바깥에 객관적인 실체가 있다'
- 유아론:'나 바깥에 객관적인 실체가 없다'
신은 죽었다
니체는 신을 죽였다.
니체는 도덕에도 역사가 있고 계보가 있다 생각했고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으로 구분했다. 주인의 도덕은 세상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고 강함, 화려함, 자신감, 긍정적인 가치를 좋은 것으로 약함, 지저분, 자신감이 없고 의존적이며 부정적인 것을 나쁜 것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노예는 세상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눴다. 노예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선이고 주인이 악이라 생각했다. 주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나쁜 의미를 씌우고 주인이 나쁜 것이라 규정한 것을 노예는 선이라 위장했다.
주인은 노예를 사랑한다 하지만 노예는 주인을 증오한다.
주인 사회는 교육을 통해 도덕관념과 예절등을 배우지만 노예 사회는 종교를 통해 쉽게 범죄를 억제했다.
하지만 부정적 감정이 쌓인 노예는 선악으로 포장한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유튜브 5분 뚝딱 철학 니체 : 신은 죽었다. part 1
이런 기독교 사상이 뿌리 깊게 내린 결과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가치는 노예의 도덕이다. 그래서 니체는 주인의 도덕을 다시 찾아야 한다며 2000년간 이어진 기독교적 가치관을 부수고 신은 죽었다 말했다.
니체에게 신의 죽음이 상징하는 것은 사라진 선과 악의 구분이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좋은 의미가 나쁜 의미로 바뀔 수 있으며, 또한 그 의미는 왜곡되어 있을 수도, 위장했을 수도 있다.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지만 선악은 명분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선을 명분으로 이용하는 순간 악이기 때문.
니체는 신을 죽인 게 아니라 신이란 명분을 부숴버렸다.
언어에는 거울 같은 이중성이 있다. 사람은 대상에 대한 의미를 서로 정반대로 알고 있어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래서 선악, 정의 같은 규범들을 기준으로 세우는 순간 한쪽으로 기울어 버린다. 앞세우는 그 순간부터 모순이다, 그런 출발점에 모든 논제들은 의미가 없다.
니체는 인간은 인생을 끝없이 반복해서 영혼회귀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는 아모르파티를 그리고 위버맨 쉬라는 인간의 이상을 만들었다.
위버맨쉬 (독일어: Übermensch / 영어: Overman)
삶에 있어서 절대적 판단은 없다.
삶은 사실판단이 아니라 가치판단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답이 있을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긍정할 줄 알아서 고통마저도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기회로 받아들이며 외부의 힘이나 절대자에게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삶에 집중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해 내는 자 깨달음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기꺼이 고통과 마주하는 용기를 지닌 자, 매번 자신을 극복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위버멘쉬라 한다. (불교의 깨달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선과 악의 본질, 정의 (正義, Justice) 란 무엇인가?
삶에 문제는 대부분 본질을 찾으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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