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던전

9장. 깨달음 v0.8

paradigmdragon 2024. 8. 22. 20:42

프로젝트와 글 중에서 버전(v)을 붙인 모든 것들은 계속 업데이트할 것임을 명시합니다.

 

 

 

불교에서는 공(空)은 비어있다, 또는 없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무(無)나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본질적이고 독립적인 실체가 없음을 말하죠 저는 공이란 개념을 좌표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존재는 하지만 그 좌표로 가보면 실체는 없는 거죠.

공은 연기(緣起)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기는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서로 의존적으로 존재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은 연기의 결과로, 모든 것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뿐, 고정된 자아나 실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공의 개념은 무아(無我)[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음]와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우리는 자아가 고정된 실체라고 믿지만, 불교에서는 자아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건들의 집합체일 뿐이라고 봅니다. 공의 이해와 깨달음은 자아에 대한 집착, 우리의 고통이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해서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게 하고, 이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김승연 화백



연기의 기본 원리는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서로 의존하며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연기(緣起)라는 한자에는 "조건에 따라 일어남" 또는 "인연에 의해 발생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佛, Buddha)는 "깨달은 자"를 의미합니다. 부처는 모든 무명(無明, 무지)과 집착을 극복하고, 연기 의 진리를 완전히 깨달아, 윤회의 고리를 끊은 존재입니다.

윤회는 생사(生死)의 순환으로, 모든 존재가 업(業)에 의해 생명과 죽음을 반복하며 고통을 겪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무지와 집착으로 인해 계속되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들은 이 고통스러운 순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보살(菩薩, Bodhisattva)은 깨달음을 얻었거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해탈뿐만 아니라 다른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윤회의 세계에 남기로 선택한 존재입니다. 보살은 자비심(慈悲心)을 가지고,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습니다. 보살은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중생들과 나누고, 그들이 해탈에 이를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보살의 행위는 철저히 이타적이며,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중생들과 나누고 그들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 중 어느 종교가 맞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현재를 포기하란 의미로 들리기도 하지만, 주기도문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이죠, 그렇다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건 뭘까요? 예수는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장 20~21절)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8장 16~17)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고,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인데, 어린아이들의 특징이 뭔가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이 다르죠,  (포즈를 취하고 허공에 장풍을 날리는 장난을 하는 아이처럼) 풍부한 상상력과 순결한 믿음입니다.

 

 

불교에서의 깨달음과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모두 내면의 진리를 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내면에서 진리와 평화를 찾는 거죠.

 

 

 

 

 

 

이 세상이 천국입니다.

 

 

프롤로그에서 언급했지만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위대한 성인들은 이미 진리를 알려줬습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아라.

 

바로 황금률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낫 놓고 'ㄱ'자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황금률에 따라 행동하며 사고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이 진리에 담긴 철학은 "나" 와 "남"을 을 동일시하며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겁니다.
너는 나, 나는 너, 우주가 나이며 내가 우주다. 세상 만물이 나다. 남과 나는 본래 하나다. 살면서 한 번쯤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겠죠.  내가 있어야 남이 있고 남이 있어야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복사 붙혀넣기가 가능한 가상현실의 존재가 되었다면, 수많은 복제된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없죠.

 

모든 사람이 황금률을 따르고 산다면 그런 세상이 바로 유토피아가 아닐까요?

 

 

 

 

당신은 이 세상을 부정하는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찾아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세상을 부정하는 무언가를 찾아내거나 생각하는 순간 당신의 세상은 없어지거나 무너집니다. 만약 시뮬레이션이라면 버그를 발견한 상황이겠죠. 우리 우주의 법칙은 모든 인류의 개별적인 세상을 통합적으로 유지하고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관입니다.

 

 

 

 

 

 

우리 인생과 세상은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우주의 공허에서 우연하게 세상에 피투되었을까요?

 

무한에서 단 하나의 유일한 가능성이 실현된 필연적 결과가 우리 인생이며 지금 이 세상입니다.

 

정말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라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단순한 우연이나 무작위의 결과가 아닌, 필연적인 과정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자신의 삶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의미를 바탕으로 다시 세상에 기투해야 합니다.

 

 

 

 

 

세상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수많은 믿음과 생각들을 존중하고, 다양한 관점들을 수용하며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에피도라를 명료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열린 마음(예수의 어린 아이처럼)을 통해서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6.54 ...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를 통해 - 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르게 본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 논리철학 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