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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도라[의식의 초점]_패러다임드래곤의 철학 v1.8

paradigmdragon 2024. 11. 3. 22:49

패러다임드래곤 세상을 바꾸는 용

프로젝트와 글 중에서 버전(v)을 붙인 모든 것들은 계속 업데이트할 것임을 명시

(2024-11-3 업데이트)

 

 

 

 

 

프롤로그

 

 

 

 

철학 [Philosophie]

 

철학이 뭘까?

 

철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자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다. 순수한 어린아이가 접하는 철학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게도 하지만, 고정관념, 편견이라는 창틀과 감정이라는 색안경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각자 다른 창을 통해 서로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평생 동안 형성된 이 창에 다른 말은 신념이다

 

철학은 오해가 많지만 사실 가장 필요한 학문이다. 철학은 왜?로 시작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준다


선과 악의 본질, 정의 (正義, Justice) 란 무엇인가?

올바른 판단 기준과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은 철학적 사고에서 나온다.

극단적인 전쟁 상황에서 내 편이면 선, 정의라는 명분, 나는 좋은 사람이다 생각한다면 대립하는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선악과 정의는 사라진다.  전쟁의 명분은 처음부터 모순이기 때문이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데로 남을 대접하라,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아라"  수많은 종교와 철학의 진리 <황금률>은 남과 나를 동일시 하는 사고방식이다.  남을 나와 동일시 했을 때 내가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남에게 행동하는 건 이미 악, 나쁨이다. 이게 본질이다. 남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준다면 선일 수 없으며 정의라 부를 수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또한 논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신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물리적인 외부 세계가 아닌, 정신세계에서 만들고 판단하게 된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신념과 관점으로 서로 다른 현실을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객관적 사실이나 본질이 아니라, 신념이란 창에 투영된 상(像)이다.

 

우리는 82억 명이 공존하는 실제(實際, real) 물리적 현실에서 소통하고 수많은 관계와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철학을, 누군가는 신을, 또 누군가는 과학을 믿으며, 각자 내면에 구축한 세계관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짜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샘 리처드 (Sam Richards) 팬실베니아주립대 사회학교수

 

우리가 어떤 것을 진짜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각자의 세계에서 실재한다

 

신이라 불린 철학가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며 사실들의 총체"라고 말했다.

현실은 인류의 모든 믿음들이 함께 존재한다. 신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그리고 다른 무언가를 향한 다양한 믿음들이 모든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믿음들과 대치되는 비물질적 대상은 실제 현실 세계에 현현할 수 없으며 각자 주관적 정신세계에서만 실재한다.  즉 물리 법칙을 공유하는 객관적 현실은 이러한 믿음들이 충돌하지 않는 ‘믿음 중립 지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관적 세계들이 위대한 깨달음을 중심으로 합의될 때, 비로소 객관적 현실의 실체를 형성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대표되는 심신이원론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개념을 제시하여 과학과 종교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과학자들은 종교 재판의 두려움 없이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문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런 위대한 깨달음이 담긴 철학은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고 정립하는 여정이다. 단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철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하여 고정관념을 허물게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각자의 신념을 재평가하고,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우리는 위대한 깨달음을 언어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많은 이들이 손가락 끝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그 너머의 달을 보지 못한다. 진정한 앎에 이르려면 스스로 사유하고 경험하며 깨달아야 한다. 언어로 이해하는 것과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씨앗 같은 철학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된다.

 

 

 

 

패러다임의 전환

 

렇다면 나아가 주관적 정신세계와 객관적 현실 "믿음중립지대" 에피도라(epidora) 복수의 정답과 입체적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신의 존재 유무나 환생 등 형이상학적인 논제들은 무의미해지고 평화로워진다. 

 

 

각자의 믿음이 실재하는 이상(理想),

이 철학을 이해한다면 인류는 위대한 도약을 이룬다.

인간의 적응력은 어찌 보면 축복이자 저주다. 소중한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는 저주이며, 새로운 걸 탐구할 수 있게 만드는 축복이다. 오래전 세상에 나타난 성인들은 인류에게 진리를 알려주었지만 우리는 그 소중한 진리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신이라 불린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이 사람은 후기 철학에서 자신의 전기 철학을 비판한다. 자신의 전기 철학에 문제가 많다고 수정을 했다. 자신의 철학을 철회했다는 것. (개인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을 동경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내가 틀렸을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관계와 인연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구축한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고정관념들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고,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메타적인 관점에서 내 생각과 다른 의견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인연은 위대한 철학을 남긴 위인들과도 연결될 수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자!

 

 

 

 

 

 

 

 

 

 

 

 

 

 

 

 

모든 순간의 나를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차례

 

프롤로그

 

1장. 세상을 올바르게 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2장. 신은 죽었다

3장. 의식

4장. 관측자

5장. 존재와 시간

6장. 에피도라

7장. 종교

8장. 우주의 탄생 ∞

9장. 깨달음

 

에필로그

 

 

 

 

 

 

 

 

 

 

 

 

 

 

 

 

 

 

 

 

 

 

1장. 세상을 올바르게 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사람들은 저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같은 상황에 놓여도 같은 관점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따라서, 전 인류가 생각하는 세상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고양이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회피한다. 이 두 사람의 세상에서 고양이는 믿음, 신념, 감정, 기억, 의미 등도 모두 다르게 형성된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것을 믿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느껴진다.

같은 단어 하나에도 서로 받는 느낌조차 다르고 어떨 때는 사용하는 의미가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내가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내가 말하는 것,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것,

당신이 듣고 있다고 믿는 것,

당신이 듣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

당신이 이해하는 것,

 

이렇게 열 가지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설령 그럴지라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면 안 된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인간의 세계는 언어와 경험에 사로잡혀 한계 지어져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기란 너무나도 어렵다. 한 생각을 오랫동안 잡고 있는 것도 어렵다. 생각은 휘발성이 강해서 금방 사라진다.

수많은 지식인과 성인들은 평생을 바쳐 얻어 낸 깨달음과 생각들을 정리해 개념으로 묶었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단어들을 발판, 사다리처럼 이용해 더 깊은 생각으로, 다른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그전에는 무의식이라는 게 없었다. 데카르트에 심신이원론으로 르네상스가 열리기 전에는 과학을 이단 취급하며 과학자들을 화형시켰다. 작은 개념이 명분이 된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은 세상을 바꿨고 우리는 이런 개념을 통해 너무 나도 쉽게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바꿀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것들은 이름이 없을 때는 말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나 방사능 가시광선 영역을 넘은 빛의 파장, 전자기파 등 수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아직도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신비들이나, 아직 이름 없는 개념들이 존재하며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언어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다. 말하자면 신비로운 것,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는 말하는 순간 오해를 불러온다. 또한,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과 믿음은 현실을 왜곡시키며, 그렇기에 인간의 기억은 더더욱 신용이 떨어진다. 때문에 신이라 불린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1889-1951

 

- 논리철학 논고 -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1.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1.11 세계는 사실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것들이 모든 사실들이라는 점에 의하여 확정된다.

​1.12 왜냐하면 사실들의 총체는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그리고 또한 대체 무엇이 일어나지 않는가를 확정하기 때문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정말 아쉬운 건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직접 발행한 책은 '논리철학 논고' 한 권 밖에 없다. 이후 발간된 모든 책은 사 후에 강의한 내용과 메모와 자료들을 모아 나왔다. 본인 스스로도 완벽을 추구했기에 마지막까지 출판을 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자신의 철학을 세상에 내보내지 않은 이유가 있었는지 그 의도는 아무도 모르지만 결국 직접 그가 정리한 내용은 볼 수 없다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되면 흙 속에 진주를 찾는 느낌이고, 어느 것이 진주인지조차 모를 수 있다.(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은 논리철학 논고 1권, 후기 철학은 6권)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카뮈

 

오랜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비트겐슈타인은 1951년 62세의 나이로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전 "사람들에게 내가 아주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계를 확정하는 건 일어나는 모든 사실들이다.

 

 

 



뭐가 진짜일까?

 

 

통 속의 뇌라는 사고실험이 있다. 통 속의 뇌에 컴퓨터로 자극을 주어 현실처럼 인식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실제 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 통 속에 들어있는 우리의 뇌가 가상의 자극을 현실인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면,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이 생각들은 데카르트의 악마에서 나왔다. 어떤 강력한 능력을 가진 악마가 자신에게 개입해서 모든 감각에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 경우를 상정한 사고실험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했고 "나라는 존재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일단은 사유를 하고 있다, 그렇기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없이 진실이다" 결국 그가 얻어낸 답은 의심하고 있는 이 생각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이 탄생했다.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개인의 정체성

 

 

 

 

 

 

 

테세우스의 역설은 테세우스의 배의 낡은 판자를 떼어다가 새로운 판자로 교체하는데 그 낡은 판자를 모아 옆에 똑같은 배를 만든다면 테세우스의 배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나무판자를 모아 만든 대상에 테세우스의 배라는 가상의 의미를 부여한 거지 애초에 테세우스의 배란 건 없다. 

가상으로 만든 의미는 대상을 편하게 말하기 위한 약속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사람도 매일 엄청난 수의 세포가 죽고 다시 만들어지고를 반복한다. 몸의 모든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는데 7년 정도가 걸린다. 그렇다면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나일까?

 

그렇다면 개인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기억은 개인을 완성시키는 조건이다. 통속의 뇌든, 시뮬레이션이든 기억으로 "나"라는 개인이 된다. 그 기억이 환상 같은 의미라도 인간은 그 기억으로 살아가며 그 기억을 믿음으로써 존재하게 된다. 만약 기억이 똑같이 복사된 시뮬레이션 세계의 또 다른 나는 나라고 볼 수 있을까?

 

 

  • 관념론: '오직 정신 혹은 영혼 만이 존재한다.'
  • 유물론: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
  • 심신 이원론:'물질과 정신이 둘 다 존재한다'
  • 실재론:'나 바깥에 객관적인 실체가 있다'
  • 유아론:'나 바깥에 객관적인 실체가 없다'

 

 

 

 

 

 

 

 

2장. 신은 죽었다

 

 

 

 

 

니체는 신을 죽였다.

 

 

니체는 도덕에도 역사가 있고 계보가 있다 생각했고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으로 구분했다. 주인의 도덕은 세상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고 강함, 화려함, 자신감, 긍정적인 가치를 좋은 것으로 약함, 지저분, 자신감이 없고 의존적이며 부정적인 것을 나쁜 것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노예는 세상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눴다. 노예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선이고 주인이 악이라 생각했다. 주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나쁜 의미를 씌우고 주인이 나쁜 것이라 규정한 것을 노예는 선이라 위장했다.

 

주인은 노예를 사랑한다 하지만 노예는 주인을 증오한다. 

주인 사회는 교육을 통해 도덕 관념과 예절등을 배우지만 노예 사회는 종교를 통해 쉽게 범죄를 억제했다. 

하지만 부정적 감정이 쌓인 노예는 선악으로 포장한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유튜브 5분 뚝딱 철학 니체 : 신은 죽었다. part 1

 

 

 

이런 기독교 사상이 뿌리깊게 내린결과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가치는 노예의 도덕이다. 그래서 니체는 주인의 도덕을 다시 찾아야 한다며 2000년간 이어진 기독교적 가치관을 부수고 신은 죽었다 말했다.

 

니체에게 신의 죽음이 상징하는 것은 사라진 선과 악의 구분이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좋은 의미가 나쁜 의미로 바뀔 수 있으며, 또한 그 의미는 왜곡되어 있을 수도, 위장했을 수도 있다.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지만 선악은 명분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선을 명분으로 이용하는 순간 악이기 때문.

 

니체는 신을 죽인게 아니라 신이란 명분을 부셔버렸다.

 

언어에는 거울 같은 이중성이 있다. 사람은 대상에 대한 의미를 서로 정반대로 알고 있어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래서 선악, 정의 같은 규범들을 기준으로 세우는 순간 기울어 버린다.  앞세우는 그 순간부터 모순이다, 그런 출발점에 모든 논제들은 의미가 없다.

 

니체는 인간은 인생을 끝없이 반복해서 영혼회귀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드리고 사랑해야 한다는 아모르파티를 그리고 위버맨쉬라는 인간의 이상을 만들었다.

 

위버맨쉬 (독일어: Übermensch / 영어: Overman)

삶에 있어서 절대적 판단은 없다.

삶은 사실판단이 아니라 가치판단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답이 있을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긍정할 줄 알아서 고통마저도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기회로 받아들이며 외부의 힘이나 절대자에게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삶에 집중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해 내는 자 깨달음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기꺼이 고통과 마주하는 용기를 지닌 자, 매번 자신을 극복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위버멘쉬라 한다. (불교의 깨달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삶에 문제는 대부분 본질을 찾으면 사라진다.

 

 

 

 

3장. 의식

 

 

니체는 위버맨쉬라는 인간의 이상적인 목표를 두고 짐승 사이에서 밧줄 위에서 나아가는 위험한 존재라고 말했다. ​ 니체가 말하는 짐승이란 프로이트의 원초아와 비슷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다음과 같이 나눠져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초자아(superego) = 사회적, 도덕적인 기준의 내면화 천사

원초아(id) = 원초적 본능, 욕구 악마

자아(ego) = 이 둘 사이를 컨트롤하는 역할

 

 

 

 

 

하지만 프로이트는 모든 것을 성적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했고 제자들은 여기에 반대해 새로운 이론을 만들었다.

 

 

 

Carl Gustav Jung 칼 구스타프 융 1875-1961

프로이트의 제자 칼 융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이자 우리에겐 MBTI를 만든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의식은 마치 양파처럼 의식이란 껍데기 안에 자아가 있고 그 자아 안에는 남에게 보여주는 모습인 페르소나

그 페르소나 안에 개인무의식이 있고 그 안에 집단무의식 그 안에 자기(self)가 중심을 잡고 있다.

 

융은 의식적 자아가 가장 안에 있는 자기를 찾는 것이 자기실현의 과정이고, 자아가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자기실현을 하기 위한 것이 삶의 목표라 말했다. (자기(self) 목표는 미래 지향적이다.)

 

 

 

 


자기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의식과 마주해야한다. 인정하기 싫은 더럽고 추잡하고 악한 모습까지 모두 인정하고 받아드릴 수 있어야한다. 이 과정은 엄청난 고통이다. 편견들과 들키고 싶지 않는 추악함등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과거 사실들은 바꿀 수 없지만 관점을 바꾼다면 미래가 바뀐다. 

 


인간의 무의식은 매 순간 가장 편안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을 기본 세팅으로 가지고 있다. 즉, 핑계와 합리화, 그리고 남 탓이 그 과정에서 자주 등장한다.

 

무의식에 지배된 채 욕구를 충족하는 삶을 살다 보면, 그 결과를 예감하는 불안이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유혹에 굴복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그런데 무의식이 내린 결론이 합리화라도, 그 합리화를 따라가면 높은 확률로 의도한 실제 현실이 된다.

사실 무의식은 미래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융은 자아가 무의식과 대면하고 그 속에 있는 자기(self)를 찾아가는 과정, 즉 ‘자기실현’을 삶의 궁극적 목표로 보았다. 무의식이 미래의 방향을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의식은 항상 육체를 컨트롤 할 수 없다.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휘발성이 강하다. 문득 어떤 상황에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또 생각나겠지 하고 메모를 안 했다가 생각이 나지 않는 아이디어들이 여기에 해당 된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위해 대표적인 의식을 아래와 같이 구분했다.

 

자동 상태의 [무의식]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직관의 영역인 Self[초의식]

경험, 정보를 통해 다른 의견을 말하는 자아[잠재의식]

육체의 욕망을 말하는 에고[무의식의 심장]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각기 다른 페르소나를 쓰고 있으며, 똑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우리는 그 목소리를 구분할 수 없다. 그 모든 생각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이 모든 목소리들은 자신을 사랑한다. 자신을 사랑하지만 후회할 행동을 반복하는 이유는 이런 목소리들에 정신연령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의 진화 단계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에고는 생각이 짧은 아이와도 같다. 미래보다 지금 당장이 가장 중요한 어린아이다. 자아는 그나마 상식이 통하긴 하지만, 항상 에고 말에 넘어간다. 에고는 감정에 쉽게 접근해서 무의식을 컨트롤하려고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인간 진화 단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재한 의식이 가장 육체에 가까울 테니까.   

 

 

 

이런 의식의 구분은 매슬로우 욕구의 5단계에 정신적 레벨이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아래에 있는 성욕 수면욕 배설욕 같은 욕구를 담당하는 짐승에 가까운 영역에서 시작한 에고란 의식이 감정이란 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태다.

이들의 경계는 모호해서 경계를 기준할 수 없다.

 

인간은 평상시에 무의식이 자동으로 판단해서 움직인다.  초의식은 뒤에서 지켜보고 있거나 가끔 연결되는 발언권이 적은 친구며, 실질적인 실세인 자아가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컨트롤하지만 정신 줄 놓고 에고에 유혹에 넘어가버리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에고가 무의식에 결정권을 잡게 하면 안 된다.

 

무의식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 현실을 만들어간다. 지금 길이 보이지 않거나 방법이 없다며 주저하고 있다면, 단 한 걸음만 내디뎌라. 무의식은 알아서 길을 찾아낸다. 물론, 그 과정에서 포기할 핑계도 따르겠지만, 그런 순간마다 의식적인 선택으로 현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었지만 리베트 실험 결과는 그 믿음을 부숴버렸다. 
생각은 따라온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생각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무의식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는 무의식을 의식할 수 없다. 무의식은 다른 의식들이 합쳐진 결과일 수 있으며 무의식의 목소리를 구분하거나 듣기는 힘들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좌뇌는 그 행동의 이유를 찾아내서 말이 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스플릿 브레인 실험)

 

지금 행동하는 건 무의식이며, 그 행동에 대한 생각을 만든다는 건 과거다 하지만 그 생각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무의식의 행동은 바뀐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어떤 의식의 말을 믿고 따르냐에 따라서 미래는 의도적인 창조가 가능하다.

 

영화 아바타를 떠올려보자 만약 무의식이 아바타고 의식은 다른 차원에서 연결된 컨트롤 타워라고 생각해 보자. 

컨트롤 타워에서는 아바타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아바타가 왜 이렇게 움직이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이유를 만들어내고 기억으로 저장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바타에게 좋은 정보를 알려줄 수 있고, 행동에 제재를 가할 수는 있다 (리베트 실험 - 부정적 자유의지)

 

이건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정말 우리 의식과 육체가 연결된 방식일 수 있다.

 

 

 

 

 

 

 

 

 

알아도 실천하지 못하는 건 알고 있는 게 아니다. 

(우파니샤드)



 

 

 

 

 

 

 

 

영화 '컨택트'에서 언어학자인 루이스 뱅크스 박사는 외계인과의 의사소통을 시도한다. 외계인인 헵타포드의 언어는 시간의 순차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고, 모든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비선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루이스가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고 습득하면서, 그녀의 사고가 변하기 시작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의 죽음까지도 봤다.

 

루이스는 미래를 알면서도 딸을 낳는 결정을 내린다. 이는 단순히 그녀의 선택이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아는 존재는 절대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결정론이다.

"모든 여정을 알면서, 그 끝을 알면서도 난 모든 걸 받아들여 그 모든 순간을 기쁘게 맞이하지"

 

우리는 현재를 실제라고 생각하고 시간과 꿈과 현실을 구분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통속에 뇌인지 시뮬레이션인지 절대 알 수 없다. 지금이라고 느끼는 이 순간도 환상인지 아닌지 모른다. 내가 보고 느끼고 있는 지금은 뇌에서 과거 기억을 재구성하고 있는 세상을 지금이라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거란 개념은 지나간 게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 기억이 떠오를 때면 항상 그곳에 있고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든 과거를 회상할 수 있고, 과거에 감정과 기억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현재에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삶의 끝에서의 시간은 선형이 아닌 비선형에 가깝지 않을까?

 

 

 

 

 

 


 

 

 

영원히 반복되는 과거(원형적 세계)가 태극 문양 방향인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선형적 세계를 감아드리고 있다. 끝에 사람이 서있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중력이 시간에 미치는 영향을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중력이 강한 행성에서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른다. 이는 영화 속 밀러 행성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지구에서 1초가 다른 행성에서는 1년이 될 수도 있는 극단적인 시간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우주에 절대적인 '지금'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기 다른 중력장과 속도에 의해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현재라는 것은 우주적 규모에서 의미를 잃는다.

우리의 의식은 영원히 지금에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우리는 항상 지금이라는 순간을 경험한다. 과거와 미래는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 우리가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오직 현재의 순간이다.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지만, 사실 시간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흐른다기보다, 우리가 지금이라는 상태를 연속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4장. 관측자

 


 

우주가 관측자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근거는 없다 

- 안드레이 린데 -

 

 

 

 

 

양자역학의 이중슬릿 실험에서는 관측 여부에 따라 입자의 상태가 달라지는 황당한 결과가 나왔다. 더 나아가 이중슬릿 지연된 선택 실험은 미래의 선택이 과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이중슬릿실험이란?

스크린을 향해 전자를 발사하는 장치가 있다 스크린과 발사 장치 중간에 두 개의 일시정지 모양의 이중슬릿 가림판을 설치하고 전자를 발사했다. 과학자들은 당연히 전자가 이중슬릿 모양대로 스크린에 무늬를 그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험 결과는 간섭무늬가 나왔고 간섭무늬라는 것은 전자가 동시에 두 구멍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무늬이기에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과학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감지기를 설치하고 다시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벽에는 간섭무늬가 사라지고 이중슬릿 무늬가 그려졌다. 결국 과학자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전자는 관측하기 전에는 파동상태이며, 관측을 하면 입자 상태가 된다."

 

전자의 입장에서 우리의 시간은 거의 정지 상태에 가깝다. 이는 상대성이론이 보여준 것처럼, 시간은 속도에 따라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의 흐름은 인간이 인식하는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하지만 간섭무늬는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다면?  미시세계의 시간은 다른 차원에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차원이 있을 수 있으니까.

 

미시세계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닐까..?

 

 

 

만약 인간의 관점이 레코드판위에 올라간 핀 이라면, 시간이 없는 차원에서는 레코드판 자체를 볼 수 있다.

 

 

 

레코드판위에 올라간 핀은 절대로 레코드 전체를 한 번에 볼 수 없다.

 

 

 

 

 

양자역학을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가 인간 의식에 대한 평가 자체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인간은 우주에서 스스로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의 의식은 사실 매우 특별할지도 모른다.

 

혹시 관측이 없다면 시간이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닐까?

시간이 없다면 그냥 모든 경로에 동시에 존재하는 사실로 끝이다. 아니면 다른 차원과 연결된 파동상태로 엄청난 속도로 진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관측한다는 것은 우리 시공간으로의 초대일지도?.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에 대한 유명한 반문   "아무도 저 달을 보지 않으면 저 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시각적 정보는 인간에게 신용도가 매우 높다. '보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라 믿기 때문에 믿음이 자동으로 따라온다. 하늘에 달이 보이지 않는데 달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어둠 속에 빛을 쏜다해도 물체가 없다면 빛은 보이지 않는다. 

 

 

유튜브 5분 뚝딱 철학 후설 : 초월론적 현상학 (feat. 하이데거, 윌리엄 제임스, 이상의 날개)

 

 

우리가 빛을 보기 위해선 어떠한 대상이 있어야 다. 

 

 

즉 빛이 없으면 사과가 보이지 않고. 사과가 없으면 빛이 보이지 않는다.


빛도 반사될 대상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 

 

어둠에 빛이 있어도 대상이 없으면 둘 다 있는지도 모른다. 인류의 전 시간을 통틀어서 단 한 번도 관측이 없었다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빛과 어둠을 생각하면, 빛 어둠 그리고 대상이 그리고 관측하는 의식이 있어야지만 이 관계가 성립한다.


어둠을 공간이라 생각하지만 라이프니츠의 상대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빛이 있고 대상이 있어야지만 어둠도 공간이라 볼 수 있고, 
결국 의식이 없으면 무(無)이라 말할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 조지버클리 -

 

관념론을 보면 정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지각하지 않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의 모든 인구의 개별적 정신과 절대적 믿음과 관점들이 모두 공존하는 게 우리 현실 세계다. 그래서 우리 세상은 82억의 관측자들의 공존하는 중립지대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제는 아무도 제대로 볼 수 없다.

 

 

 

 

 

 

 

 

 

 

 

 

 

 

 

5장.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

하이데거는 현대철학의 거장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존재(存在)라는 단어는 하이데거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철학에서 다루는 단어들은 대부분 20세기 초반 일본이 서양철학을 받아드리면서 만든 단어가 많다.  당시 하이데거는 일본 지식인에게 sein(존재)라는 단어도 없이 어떻게 존재론을 다룰 수 있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동양권에 그런 단어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일본에서 만들었고 그대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이 처럼 없었던 개념을 가지고 무엇을 설명기란 정말 어렵다.  이어서 다음장에서는 새로운 개념인 에피도라를 소개한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의 차이가 발생한 이유중 유력한 사실 하나는 언어적 차이다.

 

동양 언어에서는 주어에 본질(있음)이 있고 서술어에 현상(이다)이 있으며, "있다"와 "이다"라는 표현이 나누어져 있다. "있다"는 주로 주어의 물리적 존재의 궁극적 본질을 나타내고, "이다"는 주어의 상태나 속성을 설명한다.

"나는 학생이다."

"나"라는 주체: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며, 이는 변하지 않는 고유한 성질이다.

"학생이다": 나(본질)의 속성(현상)을 설명한다. 즉, "나"라는 존재가 현재 어떤 상태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나타낸다.

 

반면에, 영어의 "be" 동사나 독일어의 "sein"은 주어의 상태나 속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지만, "있다"와 "이다"의 뜻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동사로 통합적으로 사용된다. 이는 상태나 속성의 서술에 집중하며, 존재 그 자체의 본질을 명시적으로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The door is open."

"있다"로 해석: "문이 열려 있다." 여기서 "is"는 문의 상태를 나타내며, "있다"라는 의미로 문이 열려 있는 것을 설명.

"이다"로 해석: "문은 열린 상태이다." 여기서 "is"는 문이 어떤 상태인지 설명하며, "이다"라는 서술로 해석할 수 있다.

 

 

서양 철학에서는 "is"라는 서술 뒤에 숨겨진 본질(있음)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현상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배후에 있는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탐구하려고 한다. 이는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적 노력으로 이어지며, 서양 철학의 중요한 발전 방향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차이가 서양의 기술과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만든 이유는 아닐까?

 

정리해보자!

  • 본질(essence): 사물이나 존재의 근본적인 특성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사물의 고유한 성질을 나타내며, 사물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동양 철학에서는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현상적 표현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 현상(phenomenon): 본질이 외부에 드러나는 방식이다. 이는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상태나 표현을 나타낸다. 서양 철학에서는 이 현상을 통해 본질을 추론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하이데거의 철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  존재,  존재자,  현존재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피투(被投) 기투(企投)

 

인간은 자기 뜻과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졌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남이 알려준 경험으로 남과 비교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위치를 끼워 맞춰 살아간다. 보통 부모의 강요와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는 걸 잊고 주체성이 결여된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난 이 상태를 NPC라고 부른다. 게임에 나오는 그 NPC 맞다.

언젠가 "나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순간이 오고 이런 질문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느끼게 한다. 결국 자신이 세상에 던져진 피투(被投) 당했음을 자각하게 된다.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자신의 선택이 아닌 피투라는 것과 죽음을 생각해 봄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주체성이 만들어지게 된다. 비록 삶과 죽음은 자의와 상관없을지라도 현재의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자기 자신을 다시 세상으로 기투(企投) 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이런 과정을 지나온 인간을 말한다. 나는 주체성 습득의 과정을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게 하는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사는 사람은 지나온 과거에 대한 후회에 묻혀 살아가고, 미래에 사는 사람은 현재를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허상을 쫓아간다. 모든 사람이 주체성을 습득한 상태는 아니다.

 

 

"현존재"라는 말은 '거기에'라는 뜻의 'Da'와 '존재'라는 뜻의 'Sein'을 붙인 것이다. 현존재는 쉽게 말해서 우리 인간의 독특한 존재 방식을 나타내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존재자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들, 책상이나 고양이, 사람 등등. 반면에 존재는 존재자들이 있는 그 상태, 존재자들이 존재자라고 불릴 수 있게 만드는 근거라고 보면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으로 존재의 장(Field of Being)의 개념을 말했다. 이는 모든 개별 존재자들이 드러나는 방식과 존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존재를 이해함에 있어서 존재의 장이 "모든 것을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바탕, 조건"이라 봤을 때 모든 것이 가능한 바탕인 "다차원 우주"라 생각하고 존재라는 것은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식 즉 '정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존재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불교의 연기론처럼)

 

다시 말해, 인간은 진공상태에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적인 배경 속에서 그 속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서 존재한다.

 

 

 

3줄 요약

 

  • 존재(Sein): 모든 존재자가 존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배경과 조건. 무대의 배경과 같은 역할. 존재의 장(Field of Being)
  • 존재자(Seiendes):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별 사물이나 개체. 무대 위의 모든 것.
  • 현존재(Dasein):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인간 존재.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배우와 같은 존재.

 

 

 

 

이해할 거라 믿네!

 

존재(存在)는 있을 존 存 있을 재 在 둘다 있음을 말하는 한자다. 현대적 존재의 해석은 存자에 신, 사랑 같은 무형의 존재를 在자에 우리의 감각이 시공간에서 인식한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를 합친 게 존재라는 개념이다. 하이데거가 sein 이란 단어 없이 존재론을 말할 수 있냐 했지만 현재 우리는 더 업그레이드된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 개념 - 존재론적 시간

 

하이데거는 시간을 단순히 물리적인 개념으로 보지 않고, 존재론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는 시간을 현존재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연속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함께 얽혀 있는 존재의 근본적인 구조로 본다.  현존재는 시간 속에서 존재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과거를 돌아보는 존재다. 시간성은 현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이며, 이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시간과 존재가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시간은 단순히 외적인 흐름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내재된 구조다. 현존재는 시간적 존재로서, 시간의 맥락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고민한다.

 

 

세 가지 시간의 차원

 

미래: 하이데거에게 미래는 단순히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현존재가 자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가능성의 영역이다. 미래에 대한 계획과 가능성은 현재의 존재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현존재가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존재 방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현재: 현재는 단순히 지금의 순간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으로서, 현존재가 현재의 결정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조율하는 시점이다.

 

 

 

 

 

 

 

 

 

 

6장.  에피도라

 

 

리베트 실험에서, 사람들은 뇌를 자극해 손을 들리고 "왜 손을 들었냐"고 물으면 자신이 들고 싶어서 그랬다고, 그냥 들었다고 변명처럼 이유를 만들어 낸다

인간의 뇌는 매 순간 엄청난 양의 감각 정보를 수용하지만, 그중 상당수는 무의식적으로 처리되거나 주의에서 벗어난다. 이러한 무의식적 처리 과정은 주로 학습된 경험, 유전적 영향, 그리고 무의식에서 반사적으로 나온다.

 

사실 인간의 좌뇌는 이러한 무의식적 행동에 대해 논리적이고 일관된 설명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스플릿 브레인 실험) 이것이 우리가 리베트 실험의 무의식적 행동을 합리화하게 되는 이유일지 모른다.

 

리베트의 실험에 따르면 의식적 결정이 이루어지기 전에 뇌에서 이미 어떤 행동을 준비하는 신경 활동이 시작되지만, 의식적으로 그 행동을 멈출 수 있는 능력(부정적 자유 의지)은 있다고 한다.

 

즉, 행동이 시작되는 순간은 무의식적일지 몰라도, 그 행동을 멈추거나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의식적으로 내린다고 생각하는 선택들은 대부분 무의식적이거나 조건반사적인 결정일 때가 많다. 이성적으로는 올바른 결정을 알고 있어도, 사소한 유혹에 쉽게 넘어가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결국, 그런 욕구를 멈추거나 조절하지 못하면서 NPC처럼 살아가게 된다.


인간은 평소에 오토로 돌아가고 간헐적으로 수동 모드가 되는 것 같다.

NPC는 존재한다.

 

 

 

 

 

 

 

 

당신의 선택이 의식적인 결정이라 자신할 수 있나요?

 

 

 

우리가 의식적인 결정이라 믿는 것들이 사실은 아닐 수 있다. 평범한 인간의 지각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처리된다. 뇌는 매 순간 엄청난 양의 감각 정보를 수용하지만, 그중 상당수는 무의식적으로 처리되거나 주의에서 벗어난다. 이러한 무의식적 처리 과정은 우리의 행동에 깊이 영향을 미치며, 인간의 행동은 주로 학습된 경험, 유전적 영향, 그리고 무의식에서 반사적으로 나온다.

인간의 뇌는 에너지 효율성을 위해 많은 과정들을 자동화하고 무의식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결정을 의식적으로 하려는 시도는 뇌에 과부하를 일으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들을 자동화하며 살아간다. 이는 불교에서 말한 집착과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태를 "NPC"라고 부른다.

진정 자신의 꿈도, 목표도 없다. 주변과 비교하여 맞춰 살아거나 실체가 없는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덧없는 가치평가를 하며 지나치게 집착하는데 일생을 보낸다.  

 

이제 본질을 보라!

 



에피도라 (Epidora)

에피도라는 나중에 생각하는 자 에피메테우스의 "Epi"와 판도라의 "dora"에서 모티브를 얻어 가져온 단어로, "마지막 선물"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불교의 깨달음, 니체의 '위버멘쉬', 하이데거의 '현존재' 같은 일정 수준의 정신적 깨달음을 통해 주체성을 습득하고 현재에 의식을 집중할 수 있다. 더이상 과거에 묻히지도, 미래에 끌려다니지도 않은 채, 온전히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무의식을 컨트롤 하며 자신의 의도대로 미래를 창조하는 이 상태를 새로운 개념 "에피도라" 로 정의한다. 

 

 

 

 

에피도라는 각자의 믿음이 실재하는 이상(理想)을 받아드리고, 의식의 초점이 명확히 현재에 맞춰진 상태를 지칭하며, 이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 이상의 상태를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가 모든 인간 존재를 포괄하는 개념이라면, 에피도라는 현재 순간에 의식의 초점을 명확히 유지하며, 무의식적 행동을 파악하고 자기암시와 행동 실천으로 과거와 미래의 인과관계를 의도적으로 연결하여 현실을 창조하는 과정이며, 실제 현실 세계에 현현할  없던 주관적 정신세계에 실재하는 대상들에 모종의 기호들을 제거한 본질을 객관적 현실세계에 물리적 현실법칙에 맞춰 창조한다.

 

양자역학의 실험에서 전자는 관측여부에 따라 입자 또는 파동의 형태가 확정 된다. 관측자가 존재함으로써, 물리적 현실이 형성된다고 말할 수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지각할 때, 그 대상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물리적 형태로 현존하게 된다. 이는 인간의 시간성과 존재 구조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관점에서, 존재의 시간성은 인간이 특정 대상과 관계를 맺고, 시간 속에서 그 대상을 이해할 때 드러난다. 인간의 존재(Dasein)는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며,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 속에서 탐구하며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대상은 그 자체로 현존하게 된다.

에피도라에서는 의식이 시간성 속에서 인과를 연결하는 과정이 양자역학에서 관측 행위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에피도라의 순간에, 인간의 의식은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로 끌어와, 이를 통해 특정한 현실을 창조하거나 수정한다. 이 과정에서 대상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시간적 초점과 인과적 연결에 의해 물리적 현실로 드러난다.

따라서, 에피도라의 시간성은 대상이 단순히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의식의 초점과 무의식 관계 맺음 속에서 구체화되고 물리적 현실로 드러나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이 시간성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시간성과 양자역학의 관측 행위가 결합된 형태로, 의식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잡하고도 심오한 역할을 수행한다.

 

고통 속에서 얻은 깨달음이 있어도, 그 깨달음이 우리의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진정한 깨달음이라 할 수 없다. 깨달음은 단순한 통찰이 아니라, 그 통찰이 삶의 태도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행동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무의식과 진지하게 마주하고, 에피도라를 통해서 진정한 자기(self)를 찾으면 삶에 의미와 목표가 생긴다.

 

 

 

 



7장.  종교 

 

종교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불교를 종교로 볼것이냐, 유교를 종교라고 볼 것이냐 이건 철학아니냐 종교가 맞다 아니다 이런 말들도 많지만 그런 판단을 하기전에 종교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진짜 종교가 뭘까?

종교(宗敎)는 불교에서 유래했으며, 전통적으로는 '으뜸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서양에서는 주로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유일신 중심의 신앙 체계를 종교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 종교는 초월적 존재(신)의 존재를 믿고, 그 신의 뜻에 따라 인간이 살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오래 전 동양(한자 문화권)에는 기독교도 없었고, 불교도 없었다. 도교나 유교, 신선이나 무속신앙 같은 것들만 있다,  강조하는 말이지만 개념이라는게 없을 때 사람은 생각할 수도  말할 수 도 없다. 그래서 지금의 종교란 개념들을 받아드리기에도 오랜시간이 걸렸다.

서양식 종교의 개념은 동양에 존재하지 않았다. 

 

신이 없으면 종교가 아니라는 인식은, 유일신 중심의 종교가 보편적이라고 여기는 서양식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다

 

동양에서는 종교가 신앙보다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에 더 가까웠다. 유교와 도교는 인간의 삶과 사회,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며, 초월적 존재보다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실천을 중시했다. 종교적 믿음보다는 도덕적, 철학적 가르침에 더 중점을 뒀다. 이는 신앙적 의미보다는 삶의 방법론으로 기능했다.

 

동양에서는 유교와 도교를 종종 철학으로 인식한다. 이들 전통은 신앙보다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혜 도덕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이런 철학적 체계도 종교적 성격을 지닐 수 있다.

 

유교는 인간관계와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덕적 가르침을 중시한다. 공자는 신앙보다 인간 사회에서의 도덕과 의무를 강조했다.

 

인(仁): 인간다움, 자비와 사랑

의(義): 옳고 그름에 대한 올바른 판단

예(禮): 예절과 사회적 규범

지(智): 지혜

신(信): 신뢰와 진실

 

도교는 자연과 우주와의 조화를 중시하며, 인간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친다.

도(道): 모든 것의 근원적 원리이자 질서

무위(無爲):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삶

 

 

 

서양식 종교 개념에 따르면, 신이 없거나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것을 종교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동양의 경우, 종교는 삶의 방식, 도덕적 가르침, 사회적 규범을 포함할 수 있으며,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더라도 충분히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의 부처는 전통적인 서양식 종교의 신이나 전지전능한 존재와는 다르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은 인간 존재와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이 깨달음의 핵심은 고통(Dukkha)의 이해와 그 해탈 방법에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번역 과정에서 '고통'으로 번역되었지만, Dukkha는 단순히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환경이나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하이데거의 피투성, 즉 인간이 세상에 던져졌고, 다시 죽음으로 던져진다는 개념과 유사하다.

 

따라서 Dukkha를 단순히 고통으로 해석한다면 불교의 위대함을 오해할 수 있다. 불교는 단순히 고통을 극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을 이해하고, 그 조건에서 해탈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불교의 고통은 번역의 과정에서 고통이라고 번역되었지만 고(苦) = Dukkha이며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환경, 또는 상태를 말한다. 하이데거의 피투성 즉, 세상에 피투되었고 인간이 세상에 던져졌고, 다시 죽음으로 던져진다는 개념과 유사하다 고통의 의미로만 해석하면 안된다.

 

부처의 깨달음은 사성제로 요약된다. 이는 고통(Dukkha)의 본질과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설명하는 불교의 핵심 교리다.

 

사성제 (四聖諦, The Four Noble Truths):

  • 고제(苦諦):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 집제(集諦): 고통의 원인은 집착(욕망)이다.
  • 멸제(滅諦): 고통은 집착을 버림으로써 멸할 수 있다.
  • 도제(道諦): 고통을 멸하는 방법은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해탈의 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주요 개념으로 구성된다

 

팔정도 (八正道, The Eightfold Path): 고통을 끝내고 해탈에 이르기 위한 실천 방법

 

  • 정견(正見): 올바른 견해 –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 삶과 세계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
  • 정사유(正思惟): 올바른 생각 –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자비와 사랑을 실천 이타적이고 긍적적인 생각을 하는 것.
  • 정어(正語): 올바른 말 – 거짓말하지 않고, 불필요한 말을 삼가며 진실을 말함 진실되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
  • 정업(正業): 올바른 행동 –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실천
  • 정명(正命): 올바른 생활 – 윤리적으로 올바른 생계를 유지
  • 정정진(正精進): 올바른 노력 – 악을 피하고 선을 증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 정념(正念): 올바른 마음챙김 – 현재 순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유지 
  • 정정(正定): 올바른 집중 – 명상과 집중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음

부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탈(해방)과 열반(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것이다. 열반은 더 이상 고통과 윤회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부처는 자신의 가르침을 모든 이들에게 열어 놓았고,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진리를 깨닫도록 독려했다.

 

해탈: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열반: 모든 번뇌와 욕망이 사라져 평화와 행복에 도달한 상태.

 
 

 

불교에서는 공(空)은 비어있다, 또는 없다라는 의미가 있다. 단순히 무(無)나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본질적이고 독립적인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공이란 개념을 좌표라고 생각했다.  분명 존재는 하지만 그 좌표로 가보면 실체는 없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공은 연기(緣起)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연기는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서로 의존적으로 존재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은 연기의 결과로, 모든 것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뿐, 고정된 자아나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공의 개념은 무아(無我)[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음]와 밀접하다. 우리는 자아가 고정된 실체라고 믿지만, 불교에서는 자아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조건들의 집합체일 뿐이라고 본다. 공의 이해와 깨달음은 자아에 대한 집착, 우리의 고통이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해서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게 하고, 이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연기의 기본 원리는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서로 의존하며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緣起)라는 한자에는 "조건에 따라 일어남" 또는 "인연에 의해 발생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처(佛, Buddha)는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부처는 모든 무명(無明, 무지)과 집착을 극복하고, 연기 의 진리를 완전히 깨달아, 윤회의 고리를 끊은 존재다.

윤회는 생사(生死)의 순환으로, 모든 존재가 업(業)에 의해 생명과 죽음을 반복하며 고통을 겪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무지와 집착으로 인해 계속되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들은 이 고통스러운 순환을 벗어날 수 없다.

 

보살(菩薩, Bodhisattva)은 깨달음을 얻었거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의 해탈뿐만 아니라 다른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윤회의 세계에 남기로 선택한 존재다. 보살은 자비심(慈悲心)을 가지고,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보살은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중생들과 나누고, 그들이 해탈에 이를 수 있도록 안내한다.

보살의 행위는 철저히 이타적이며,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중생들과 나누고 그들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독교의 교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현재를 포기하란 의미로 들리기도 하지만, 주기도문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건 뭘까? 예수는 말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장 20~21절)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8장 16~17)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고,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인데, 어린아이들의 의 특징이 뭘까? 

 

순수한 믿음

 

어린아이에게 여기가 천국이라고 말하면 , 그 아이는 어떻게 반응할까?

아이의 순수한 믿음을 어른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한계 그어버린다.

 

사실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이다.  아직 완전하지 않을 뿐이며, 우리가 믿지 않아서 그렇다.

 

예수는 마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5.외식(위선)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는 <황금률>을 율법으로 정했다.

아이처럼 순수하게 세상을 보고 믿음을 가지는 것, 그리고 마태복음 7장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천국에 임하는 길이며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아버지의 뜻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일부 개신교들은 종교를 돈벌이로 이용한다. 그건 신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더러운 욕망으로 선량한 신도들을 속이는 사기에 불과하다. 구원을 받기 위해 현생을 지옥으로 만들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 뒤에서 회개를 하면 된다는 잘못된 믿음은 사회적 암이 되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믿음은 고착되어 썩어버리기도 한다. 굶어 죽을 걱정을 해야 했던 시대적 배경에 배움이 부족한 계급들은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고 사회적 안전장치로 기능하면서 다수에 신앙이 되었지만 부족한 배움은 융통성 없이 성서에 쓰인 비유나 말들을 오해하거나 정치에 이용하기 시작했고 신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이단으로 몰아 숙청했다. 결국 모순투성이 믿음은 대를 이어 순수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에게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한계 지어버렸고 그렇게 의문점에 대한 질문도 답도 하지 못한 채 그런 자신도 이해 못 한 맹목적인 믿음은 관습이 되어 오래 이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아직도 강요한다. 

 

성경에 모순은 <황금률>로 풀어야한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는데 어떤 걸 어떻게 믿는지에 따라 종교 이름이 바뀐다. 하지만 구약에는 모순이 너무나 많았고 이런 문제점을 고친 신약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수정 율법이다. 이게 2000년 전이다. 신약을 받아들인 종교들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고, 아직까지도 구약만을 믿는 종교는 전쟁과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현실에서 아무 기적도 행사하지 못하고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면 사실 그건 사라져야 할 썩은 믿음이다. 

 

 

 

 

 

 

 

 

 

 

 

 

8장. 우주의 탄생 ∞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무한하고 형체가 없는 근원적 상태, 무극이 곧 태극을 이룬다는 뜻이다. 즉, 아무 것도 없고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주의 모든 것이 생성되고 분화하여 태극이라는 만물의 원리가 만들어진다는 철학적 개념을 담고 있다.

  • 무극(無極): 무한하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즉 무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는 형체가 없는 근원적인 혼돈을 나타낸다.
  • 태극(太極): 태극은 우주의 근본 원리로, 무극에서 분화된 첫 번째 상태다. 여기서 우주 만물의 생성이 시작된다.
  • 음양(陰陽): 태극에서 음과 양이 나뉘어, 두 가지 상반되지만 상호 의존적인 힘이 된다. 
  • 삼태극(三太極): 삼태극은 음양의 조화에 제3의 요소가 더해진 상태. 이 제3의 요소는 음과 양의 균형을 유지하며, 삼재(하늘, 땅, 인간)와도 관련이 있다.
  • 사상(四象): 음양이 다시 분화되어 네 가지 상징적 상태(소양, 소음, 태양, 태음)가 된다.
  • 오행(五行): 우주의 모든 만물은 다섯 가지 원소(목, 화, 토, 금, 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이 상호작용한다.

 

이 개념을 적용하면 무극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 즉 어둠 그 자체다.

빛이 존재하면 그 순간 태극이 된다. 이 태극을 하이데거의 존재와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생기고, 이로 인해 음과 양이 나뉘게 된다. 그걸 관측하는 의식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나라 전통 사상에서 나오는 제3의 힘이 작용하며, 삼태극. 우주의 모든 관계가 완성된다.

 

한글 창제의 기초가 된 복희씨의 하도(河圖)

하도를 기초로 오행이 탄생했다.

 

 

  • 1과 6: 북쪽, 물(水)을 상징하며, 흑색
  • 2와 7: 남쪽, 불(火)을 상징하며, 적색
  • 3과 8: 동쪽, 나무(木)를 상징하며, 청색
  • 4와 9: 서쪽, 금(金)을 상징하며, 백색
  • 5와 10: 중앙, 땅(土)을 상징하며, 황색

 

 

옛날에 청색은 파란색과 녹색을 포함한 색이였다. 그래서 푸르다. 파란신호라 말한다. 색의 개념도 현대에 들어서 확장되었다. 

 

 

 

 

 

 

 

"우주는 인간을 탄생시켰고, 인간을 위해 우주가 탄생했다."

 

우주와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그 관계는 마치 부분과 전체가 반복되는 프렉탈 구조와 같다. 인간은 우주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우주는 인간을 통해 의미를 찾는다.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인 이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우주와 인간은 서로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인류가 영원히 관측하지 못하면 존재한다 말할 수 없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존재하는 건 어둠뿐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대상이 없다면 공허한 어둠밖에 없다. 

어둠에 빛과 대상이 함께 나타난다. 하지만 어둠과 빛과 대상만 있다고 해도 관측하는 의식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존재한다 말할 수 없다. 

 

어둠에 빛이 있으려면 대상이 있어야 하고, 이 모든 걸 존재한다 말할 수 있으려면 관측하는 의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명제는 정답아닐까?  

 

"우주는 인간을 탄생시켰고, 인간을 위해 우주가 탄생했다."

 

인간은 시간을 원인이 결과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존재자인 우리를 위해 우주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이 우주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주는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순환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9장. 깨달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위대한 성인들은 이미 진리를 알려줬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아라.

 

<황금률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 간단한 진리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황금률에 따라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 진리에 담긴 철학은 "나"와 "남"을 동일시하며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너는 나, 나는 너, 우주가 나이며 내가 우주다. 세상 만물이 나다. 남과 나는 본래 하나다.

내 안에 하나님이 있으며, 그건 남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함부로 남을 대할 수 없다.,

 

불교에서도 자타불이(自他不二)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세상 모든 현상과 존재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되며, 나와 남의 구별도 궁극적으로 마음의 차이에 불과하다. 

 

내가 있어야 남이 있고 남이 있어야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복사-붙혀넣기가 가능한 가상현실의 존재였다면, 수많은 복제된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없다.

 

자기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

 

모든 사람이 황금률을 따르고 산다면 그런 세상이 바로 유토피아고 천국 아닐까?

 

 

 

 

 

 

 

김춘수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개념들, 그리고 신비로운 현상들은 실재할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우리의 인식 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 적절한 조건이 갖춰지면 드러날 것이다. 언젠가 인간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우리 세계로 와 꽃이 될 거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하나님을 믿고, 누군가는 부처님을 믿으며, 또 다른 사람은 과학을 믿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이 특정 종교의 유일신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그 사람의 주관적 현실에서 실재로 경험된다. 이 믿음은 그 사람의 세계관에서 절대적 진리로 작용하며, 그 사람의 세계는 진짜가 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소통하며, 수많은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내면에 각자의 세상을 구축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내가 맞다고 생각해 남에게 강요하거나 함부로 부정하는 것은 (감당할 수 있다면) 매우 신중해야 한다. 남의 세상을 무너뜨리면 엄청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세상을 부정하는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찾아낼 수 없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세상을 부정하는 무언가를 찾아내거나 생각하는 순간 당신의 세상은 없어지거나 무너진다. 만약 시뮬레이션이라면 버그를 발견한 상황이다. 우리 우주의 법칙은 모든 인류의 개별적인 세상을 통합적으로 유지하고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관이다.

 

 

 

우리 인생과 세상은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우주의 공허에서 우연하게 세상에 피투되었을까?

 

거꾸로 보면 무한에서 단 하나의 유일한 가능성이 실현된 필연적 결과가 우리 인생이며 지금 이 세상이다.

 

난 이 모든 것을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존재가 단순한 우연이나 무작위의 결과가 아닌, 필연적인 과정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나아가며 자신의 삶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 에너지로 채우고 보살처럼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주는 존재가 된다면 그게 필연이다. 

 

세상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수많은 믿음과 생각들을 존중하고, 다양한 관점들을 수용하며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에피도라를 명료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편견 없는 열린 마음(예수의 어린 아이처럼)을 통해서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다.

 

 

 

 

 

 

6.54 ​...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를 통해 - 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르게 본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 논리철학 논고

 

 

 

 

 

 

 

 

 

 

 

 

 

 

 

 

 

 

 

 

 

에필로그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 X

 

모든 것은 상대적이란 말은 모순이다. 상대적조차 상대적이라면 상대적이지 않은 것이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것이 존재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개별적 존재다. 내가 결정론을 믿더라도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상대적인 세상도, 절대적인 세상도 함께 존재한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할 수 있는 이념이나 사상은 존재할 수 없다.

 

 

 

패러다임드래곤의 탄생

 

세상이 사랑으로 물들어 행복하던 순간들이 수많은 미래와 연결된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나는 세상을 바꾸는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흥미 있는 눈빛으로 다시 질문했다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데?"

나는 웃으며 말했다. "사랑으로"

 

그리고 "패러다임드래곤" 이름을 선물 받았다.

이 모든 건, 덕분이다.

 

 

 

 

 

 

 

 

세상을 바꾼다면 그 동기가 사랑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단언컨대 사랑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사랑이어야만 한다.

언어는 의미를 두고 그렇게 부르자고 약속을 한 것이지만 사람, 상황, 시간에 따라 쓰이는 목적과 느낌 의미가 다른다. 그래서 어떤 한 언어를 정확히 한 개념으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사랑도 뭔지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정말 어렵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저 모든 조건에 부합했을 때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사랑은 어린아이 수준이다. 이 사랑은 예수와 부처가 실천한 성인급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쉬운말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그 방법이 엄격히 옳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옳은 길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늘에 별이 되어 사라진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약속이었고, 내 존재 이유라 생각했습니다.

 

그 빛을 따라 어두운 허공을 향해 홀로 외로운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우주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주위는 차갑고, 적막은 가슴을 조여왔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친 몸과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고,

 

이제는 왜 가는지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포기할 이유를 찾는 수많은 변명들이 떠오르며,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그 외로움과 칠흑 같은 어둠은 나를 둘러쌌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서럽게 울었습니다.

 

떨어지는 눈물이 반짝이는 순간,

 

그때 처음으로 뒤를 돌아 봤습니다.

 

 

 

 

 

 

 

 

 

 

 

 

 

 

 

 

 

 

 

 

 

 

 

 

 

 

 

 

눈에 들어온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광경이었습니다.

 

나를 뒤따라오는 수많은 별들이 이어져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고,

 

그곳에서는 찬란한 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내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은 내가 내달려온 어둠의 허공이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된 존재였습니다.

 

내가 걷는 길이 곧 다른 이들에게도 길이 되어

 

그들을 인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 뒤에는 찬란한 빛의 길이 펼쳐져 있고,

 

그 길은 내가 어디로 가든 언제나 나와 함께할 것입니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으며,

 

그 길은 나의 빛으로 인해 환히 밝혀질 것입니다.

 

 

 

 

 

 

 

 

 

각자의 믿음이 실재하는 이상(理想), 에피도라

이 철학을 이해한다면 인류는 위대한 도약을 이룬다.

 

 

오만과 자만을 경계하는 자세로 편견과 고정관념이란 벽을 허물고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사랑하며 나아가는 길. 

 

패러다임드래곤의 철학은 서로 돕고 사는 세상, 살맛나는 세상을 위한 홍익인간 철학이다.  세계관, 또는 이념에 가까운 지침이기도 하다.  이 의미를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내 신념이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 다른 이의 믿음을 짓밟는 불필요한 갈등과 감정을 해소할 수 있고,  아무 의미도 없는 신기루에 낭비하는 에너지를 아끼며 서로를 위한 세상을 만드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어려운 용어가 많은 철학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 언어로 정리하고,  그 철학을 바탕으로 솔선수범한다면 언젠가 패러다임드래곤은 세상을 바꾸는 용이 될 거라 믿는다.

 

 

 

 

 

반갑습니다 관측자 여러분!

 

여러분의 관측결과는 어떠신가요?

 

부디 패러다임드래곤이 승천하는 용으로 보이셨길 바랍니다.

 

저에게 있어 여러분의 삶은 그저 우연하게 생겨난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