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의식적으로 결정한다고 믿는 많은 행동이 사실은 자동화된 무의식적 반응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행동은 주로 학습된 경험, 유전적 영향, 그리고 무의식에서 반사적으로 나온다. 인간의 뇌는 에너지 효율성을 위해 많은 과정들을 자동화하고 무의식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들을 자동화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불교에서 말한 집착과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상태를 "NPC"라고 부른다.
주변과 비교하며 삶의 기준을 타인에게 두고, 실체 없는 가치와 사회적 평가에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스스로 설정한 꿈이나 목표 없이 외부 시선에 의해 방향을 정하는 삶이다.
또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에 힘들어하고, 과거에 사로잡힌 사람은 후회 속에 머물고, 미래에 얽매인 사람은 현재를 희생하며 불안 속에 살아간다. 이들은 모두 현재를 잃고 있을 뿐이다.
이런 모든 문제는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회, 타인, 무의식이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하게 만든다.
철학은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게 한다.
인간의 무의식은 매 순간 가장 편안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을 기본 세팅으로 가지고 있다. 즉, 핑계와 합리화, 그리고 남 탓이 그 과정에서 자주 등장한다.
무의식에 지배된 채 욕구를 충족하는 삶을 살다 보면, 그 결과를 예감하는 불안이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유혹에 굴복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그런데 무의식이 내린 결론이 합리화라도, 그 합리화를 따라가면 높은 확률로 의도한 실제 현실이 된다.
사실 무의식은 미래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MBTI를 만든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융은 자아가 무의식과 대면하고 그 속에 있는 자기(self)를 찾아가는 과정, 즉 ‘자기실현’을 삶의 궁극적 목표로 보았다. 무의식이 미래의 방향을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의식은 항상 육체를 컨트롤 할 수 없다. 그리고 단편적으로 의견을 말하고 떠오르는 생각은 휘발성이 강하다. 문득 어떤 상황에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또 생각나겠지 하고 메모를 안 했다가 생각이 나지 않는 아이디어들이 여기에 해당 된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위해 대표적인 의식을 아래와 같이 구분했다. (원래 사용하는 단어 의미를 수정했다)
자동 상태의 [무의식]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직관의 영역인 Self[초의식]
경험, 정보를 통해 다른 의견을 말하는 자아[잠재의식]
육체의 욕망을 말하는 에고[무의식의 심장]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각기 다른 페르소나를 쓰고 있으며, 똑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우리는 그 목소리를 구분할 수 없다. 그 모든 생각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이 모든 목소리들은 자신을 사랑한다. 자신을 사랑하지만 후회할 행동을 반복하는 이유는 이런 목소리들에 정신연령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의 진화 단계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에고는 생각이 짧은 아이와도 같다. 미래보다 지금 당장이 가장 중요한 어린아이다. 자아는 그나마 상식이 통하긴 하지만, 항상 에고 말에 넘어간다. 에고는 감정에 쉽게 접근해서 무의식을 컨트롤하려고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인간 진화 단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존재한 의식이 가장 육체에 가까울 테니까.
이런 의식의 구분은 매슬로우 욕구의 5단계에 정신적 레벨이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아래에 있는 성욕 수면욕 배설욕 같은 욕구를 담당하는 짐승에 가까운 영역에서 시작한 에고란 의식이 감정이란 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태다.
이들의 경계는 모호해서 경계를 기준할 수 없다.
인간은 평상시에 무의식이 자동으로 판단해서 움직인다. 초의식은 뒤에서 지켜보고 있거나 가끔 연결되는 발언권이 적은 친구며, 실질적인 실세인 자아가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컨트롤하지만 정신 줄 놓고 에고에 유혹에 넘어가버리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에고가 무의식에 결정권을 잡게 하면 안 된다.
무의식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 현실을 만들어간다. 지금 길이 보이지 않거나 방법이 없다며 주저하고 있다면, 단 한 걸음만 내디뎌라. 무의식은 알아서 길을 찾아낸다. 물론, 그 과정에서 포기할 핑계도 따르겠지만, 그런 순간마다 의식적인 선택으로 현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었지만 리베트 실험 결과는 그 믿음을 부숴버렸다.
생각은 따라온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생각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무의식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는 무의식을 의식할 수 없다. 무의식은 다른 의식들이 합쳐진 결과일 수 있으며 무의식의 목소리를 구분하거나 듣기는 힘들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좌뇌는 그 행동의 이유를 찾아내서 말이 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스플릿 브레인 실험)
지금 행동하는 건 무의식이며, 그 행동에 대한 생각을 만든다는 건 과거다 하지만 그 생각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무의식의 행동은 바뀐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어떤 의식의 말을 믿고 따르냐에 따라서 미래는 의도적인 창조가 가능하다.
영화 아바타를 떠올려보자 만약 무의식이 아바타고 의식은 다른 차원에서 연결된 컨트롤 타워라고 생각해 보자.
컨트롤 타워에서는 아바타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아바타가 왜 이렇게 움직이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이유를 만들어내고 기억으로 저장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바타에게 좋은 정보를 알려줄 수 있고, 행동에 제재를 가할 수는 있다 (리베트 실험 - 부정적 자유의지)
이건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정말 우리 의식과 육체가 연결된 방식일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안되고,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은 그저 머릿속에 있는 생각에 불과하다.
옳은 선택을 하려면,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 이 기준은 의식적으로 설정해야 하며, 그 방향을 정할 때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을 끊임없이 떠올려야 한다.
올바른 판단 기준을 세우기 위해선 본질을 봐야 한다.
전쟁에서는 과연 선과 악, 정의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내 편이 선하고 정의롭다고 믿지만, 상대 역시 그들만의 정의와 선을 믿고 있다. 서로를 악이라 규정하며 각자의 정의를 주장하는 이 상황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선이라는 명분 아래 악이 행해지거나, 정의가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면, 그것은 선이거나 정의라 부를 수 없다.
모순에서 출발한 모든 논제는 무의미하다.
현실에서는 선악과 정의를 명분 삼아 선동이 이루어지고,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며 다수의 군중심리 속에 소수의 목소리는 묻히곤 한다.
그래서 선과 악의 본질은 무엇인지,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본 적이 없다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에 휘둘리게 된다.
더욱 불편한 진실은, 이러한 모순된 다툼이 종종 누군가의 욕망이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장된다는 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선’과 ‘정의’라는 명분 아래에서 모순된 갈등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부처는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이 곧 고통의 시작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갈등 역시 실체 없는 모순에서 비롯된 고통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철학적 사고는 올바른 판단 기준을 세우고,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정답은 하나가 아닌 경우도 있고, 단면적인 논리는 입체적인 실체를 포착하지 못해 역설에 빠지기도 한다.
순수한 어린아이가 접하는 철학은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게도 하지만, 성장하면서 생긴 고정관념과 편견, 감정이라는 색안경은 오히려 세상을 왜곡하기도 한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경험한다고 믿지만, 사실 각자 다른 창을 통해 서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이 창은 우리가 평생에 걸쳐 쌓아온 신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신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물리적 세계가 아닌 정신세계에서 현실을 형성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나 본질이 아니라, 신념의 창에 비친 상(像)이다.
우리는 82억 명이 공존하는 객관적 실제(實際, Real) 현실에서 소통하고 수많은 관계와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철학을, 누군가는 신을, 또 누군가는 과학을 믿으며 각자 내면에 구축한 세계관 속에서 실재(實在, existence) 하는 세상을 경험한다
실제(實際) 사실의 경우 ‘사실’에 초점
실재(實在) 실제로 존재 ‘존재’에 초점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을 진짜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각자의 세계에서 실재한다
신이라 불린 철학가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며 사실들의 총체"라고 말했다.
현실은 인류의 모든 믿음들이 함께 존재한다. 신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그리고 다른 무언가를 향한 다양한 믿음들이 모든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믿음들과 대치되는 비물질적 대상은 실제 현실 세계에 현현할 수 없으며 각자 주관적 정신세계에서만 실재한다. 즉 물리 법칙을 공유하는 객관적 현실은 이러한 믿음들이 충돌하지 않는 ‘믿음 중립 지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관적 세계들이 위대한 깨달음을 중심으로 합의될 때, 비로소 객관적 현실의 실체를 형성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대표되는 심신이원론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개념을 제시하여 과학과 종교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과학자들은 종교 재판의 두려움 없이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문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런 위대한 깨달음이 담긴 철학은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고 정립하는 여정이다. 단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철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하여 고정관념을 허물게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각자의 신념을 재평가하고, 더 높은 차원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우리는 위대한 깨달음을 언어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많은 이들이 손가락 끝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그 너머의 달을 보지 못한다. 진정한 앎에 이르려면 스스로 사유하고 경험하며 깨달아야 한다. 언어로 이해하는 것과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씨앗 같은 철학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된다.
매 순간에 나를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오만과 자만을 경계하는 자세로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편견과 고정관념이란 벽을 허물어 자기(Self)를 찾고 솔선수범으로 행동하여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태도.
패러다임드래곤의 철학은 ‘홍익인간’ 사상을 바탕으로 서로 돕고 함께 살아가는 살맛 나는 세상을 이루고자 한다.
부정의 끝은 닫힌 문이지만, 긍정의 끝은 무한한 가능성의 창이다. 닫힌 문이 아닌 열린 창을 통해 서로의 세상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순간, 세상은 비로소 더 넓고 깊게 확장된다.
언젠가 세상에 만개할 꽃을 위해 철학을 쉽게 다듬어 씨를 뿌리고, 긍정 파동을 보내며 그 꽃이 피어날 미래를 기다린다.
편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세상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의 꽃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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