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돈, 명예, 권력? 당신은 어떤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왜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잔인하고 참혹한 현실과 대면해야 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돈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속는 사람이 병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떤 환경과 교육이 그런 가치관을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사고방식이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속담처럼, 남을 속이는 사람은 타인도 자신과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타인에 대한 불신 속에 평생 의심과 걱정 속에서 살게 된다. 설령 단죄로 인해 정의가 실현된다고 해도 피해자의 비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의 잔혹함이다.
자연의 이치는 정의나 선악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가장 단순하고 효율적인 선택이 이루어질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고정관념과 편견은 현실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부처는 "집착에서 고통이 시작된다"고 했다. 선악, 정의, 부와 명예, 권력 등은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으며, 이는 인간이 만든 허상일 뿐이다. 실체가 없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는 부질없다.
우리는 선과 악의 본성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채로 태어난다.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한 채 행하는 행동은 무지가 초래하는 악이라 할 수 있다. 악은 결국 파멸로 이어지지만, 선의 선택은 열린 결말을 남긴다.
따라서 우리는 무지에서 벗어나 선을 배우고, 악을 억제하며 살아가야 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선을 행하기 위함'으로 귀결된다.
선과 악의 본질, 정의란 무엇인가?
극단적인 전쟁 상황에서는 내 편이 선이고 적은 악이라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상대방도 같은 논리로 자신을 선이라 믿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악과 정의는 처음부터 모순이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수많은 종교와 철학에서 강조된 이 황금률은 남과 나를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에 기반한다. 남을 나와 동일시했을 때, 내가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남에게 하는 것은 악이다.
선은 상대적인가, 절대적인가?
전쟁과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는 선악과 정의가 상대적으로 변질된다. 내 편이 선이고 적은 악이라는 관점은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이해관계에서 형성된 상대적 정의일 뿐이다.
그러나 선(善)은 다른 이분법적 개념들과는 달리 단순히 악의 부재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선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시작되며, 이를 넘어 적극적으로 타인과 공동체를 이롭게 하려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황금률에서 비롯된 선의 개념은 이러한 상대성을 초월하며, 모든 관계와 상황에서 적용 가능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지향점을 제시한다. 이는 선이 단순히 상대적 상황에서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윤리적 기준과 실천을 통해 구현되는 절대적 가치로 자리 잡는 이유이다.
선의 반대말은 악인가?
전통적으로 선과 악은 대립적인 이분법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선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면, 선의 반대는 반드시 악(惡)이 아닐 수 있다.
선과 악은 단순히 대립적인 관계로 설명되지 않으며, 그 사이에는 무지(無知)라는 중간 상태가 존재한다. 무지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로, 윤리적 성장과 자기 계발의 출발점이다. 비록 무지는 악처럼 해악을 의도하지 않지만, 도덕적 판단의 부재로 인해 결과적으로 악과 유사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지는 단순히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다. 무지는 선과 악으로 향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잠재적 상태로, 이를 극복하고 선으로 나아가는 선택이 인간의 윤리적 책임과 성숙으로 이어진다. 무지를 극복하는 과정은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실천적 선택으로 나아가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선과 악은 대립적인 이분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선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면, 선의 반대말은 반드시 **악(惡)**이 아닐 수도 있다.
선의 반대는 악행이나 이기심에서 비롯된 의도적 해악일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무관심, 무지, 혹은 방관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 무지: 선과 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상태.
- 무관심: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의식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
- 방관: 악을 목격하고도 개입하지 않는 행동.
따라서 선의 반대는 단순히 악으로 규정되기보다, 타인을 돕거나 이롭게 하려는 적극적 노력을 포기하는 모든 태도를 포함할 수 있다.
철학적 관점에서 본 선
칸트는 "네 행위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고 말했다. 이는 황금률과 유사하며, 선이란 개인의 행동이 보편적 기준에 부합하는 상태라 보았다.
반면, 니체는 선과 악이 사회와 종교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라고 보았다. 그는 기존의 선을 의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것을 요구했다. 선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끊임없이 창조하고 재정의해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니체는 "괴물들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네가 오랫동안 하나의 심연을 바라본다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오랫동안”이라는 시간성은 심연이 나를 들여다보게 되는 원인이며, 이는 칼 융의 그림자 통합 실패와 연결된다. 심연이 나를 본다는 것은 무의식 속 억눌린 어둠이 의식을 압도하며, 자아를 잠식하거나 분열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칼 융은 자기(Self)를 찾는 과정을 인간 삶의 이상적 목표로 보았으며, 이를 위해 무의식과의 대면과 그림자 통합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니체가 말한 심연과 괴물은 현대의 개인주의와 불신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 우리는 쏟아지는 정보와 악의 유혹 속에서 선이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악을 알고 이를 초월하려는 의식적 노력을 통해 행해지는 가치임을 깨달아야 한다. 과거를 용서하고 스스로의 추악함까지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내면의 괴물을 통합하고 그림자를 넘어서게 된다.
결국, 싸우는 괴물도, 바라보는 심연도 모두 인간 내면에 있다. 이를 외면하지 않고 대면하며 통합하는 과정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진정한 과제이자 성숙의 길이다.
선과 악, 정의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궁극적으로 실천과 연결될 때 의미를 가진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정신은 단순한 도덕을 넘어 사회적 실천으로 구현되었으며, 품앗이와 두레 같은 상호부조의 전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약 5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 정신은 지속 가능성을 증명했으며, 훈민정음 창제라는 혁신을 통해 백성을 위한 구체적 실현으로 이어졌다.
품앗이는 단순한 노동 교환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관계를 형성하며 공동체의 선을 실현하는 구체적 실천이다.
내면적 성숙이 품앗이와 같은 상호 협력의 정신으로 확장될 때, 선과 정의는 더 이상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가치가 된다.
결국, 서로 돕고 살아가는 것이 모든 철학이 꿈꾸는 인간사회의 이상을 가장 짧고 강력하게 실현하는 길이다. 이 철학적 가치를 되새기고 실천할 때, 우리는 서로를 이롭게 하며 진정한 홍익인간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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